2024년 첫눈이 왔다.
온 세상이 하얗다.
힘들어질 출근길도 잊고 마냥 좋아하는 나는 아직도 푸르다.
사실, 어젯밤에 첫눈을 맞았다.
아니, 오늘인가? 밤 12시가 넘은 그때였다.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는 딸을 픽업하고 지하주차장에 주차하고 올라온 그때,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딸과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눈을 맞았다. 우리에게 첫눈이었고 나와 딸이 함께 하는 첫눈이었다.
오늘 푸른 마음으로 시를 모았다.
눈에 관련된 시, 첫눈에 관한 시, 내 마음을 온전히 보여줄 시들을 모았다.
■눈 시 모음
첫눈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눈 내리는 날
허태기
따끈한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 창으로 다가서서
꽃비처럼 흘러내리는
눈송이를 무심히 바라보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하얀 백지가 되어
고향을 그리면
고향이 다가오고
어린 시절을 그리면
옛 동무가 찾아준다.
커피의 진한 향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떨어지는 눈송이에
넋을 맡기면
흘러내리는 눈송이마다
그리운 사람
사랑하던 사람들이
꽃잎처럼 피어나고
지난 시절의 시린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눈 내리는 날
용혜원
눈이 내리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다같이 춤을 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흐르는 음악이 된다
인파로 술렁이는 거리로 나가면
펑펑 내리는 눈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행복하게 보이고
거리 곳곳에는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눈이 내리는 날 그대를 만나면
굳게 잠겼던 마음도 열릴 것이니
한없이 내리는 눈처럼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다
눈이 내리는 날 그대를 만나면
어깨 눈이 쌓이도록
걷고 또 걷고 싶다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싶다
눈 덮인 겨울 들길을 가노라면
눈 덮힌 겨울 들길을
기차를 타고 가노라면
눈 안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눈이 내리면
이렇듯 온 세상을 다 덮거늘
그대는 왜 그리움으로만
내 가슴에 가득한가
이 차가운 바람 불어대는 겨울에
눈이 온 땅에 내리듯
그대 내 품에 가득하도록
쏟아져 내려라
눈 덮인 겨울 들길이
찬사가 터지도록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내 품에 사랑으로
쏟아져 내려라
그대 눈처럼 내게로 쏟아져 내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시 눈이 내리면
원태연
다시 눈이 내리면
생각이 나주겠지요
오랜 세월에 묻혀
어렴풋해진 얼굴
다시 눈이 내리면
생각이 나주겠지요
다시 눈이 쌓이면
떠올라 주겠지요
차곡차곡 쌓이는 눈처럼
그 얼굴과의 얘기
다시 눈이 쌓이면
떠올라 주겠지요
다시 눈이 녹으면
녹아 없어지겠지요
한 송이 한 송이
정성스레 만든 얘기
다시 눈이 녹으면
어이없이 녹아
없어지겠지요.
눈 오는 마을
김용택
저녁 눈 오는 마을에
들어서 보았느냐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마을이 조용히 그 눈을 다 맞는
눈 오는 마을을 보았느냐
논과 밭과 세상에 난 길이란 길들이
마을에 들어서며 조용히 끝나고
내가 걸어온 길도
뒤돌아볼 것 없다 하얗게 눕는다
이제 아무것도 더는 소용없다 돌아설 수 없는 삶이
길 없이 내 앞에 가만히 놓인다
저녁 하늘 가득 오는 눈이여
가만히 눈발을 헤치고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 보이지 않은 것 하나 없다
다만
하늘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 온 눈들이 두 눈을 감으며
조심조심 하얀 발을 이 세상 어두운 지붕 위에 내릴 뿐이다
첫눈은 언제 오나
이준관
첫눈은 언제 오나.
나는 첫눈을 기다리지.
첫눈이 와야
정말 겨울이 시작되지.
첫눈 오는 날을 위해
나는
장갑이며 털모자며 목도리며
모두 준비해 두었지.
첫눈은
밤에
사박사박 몰래 온다는데,
캄캄한 밤
개가 컹컹 짖기만 해도
나는 가슴 두근거리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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