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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건강

봄비 시 모음/ 류시화, 양광모, 정호승, 심훈, 이승복, 김하인

by 휴식맨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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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봄비가 잦다.

사무실 창밖으로 내리는 봄비.

창을 타고 내리는 봄비.

봄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커피를 마시게 한다.

비는, 봄비는 그렇게 나를 적신다.

■마음을 적시는 봄비 모음

봄비 속을 걷다

 

- 류시화

해안에 있는 여자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자는 더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안에 평온을 되찾다

 

 

 

봄비

 

-양광모

봄비 속에 사랑에 빠진 여자

 

심장에 맞지 않아도

사랑에 빠져 버리는

천만 개의 화살

 

그대,

피하지 못하리

 

 

 

 

 

봄비

 

-정호승

예쁘게 피어 난 제비꽃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 두었다

 

 

 

봄비

 

-심훈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에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 숨도 못 이루시네

 

 

 

봄비 단상

 

- 이승복

커피를 마시는 여자

 

막 깨어나는 새싹 곁에

봄비가 내리는 오후

생각의 껍질을 벗어

눈감아 침몰하는 나

내게서 사랑은 조용히

먼발치서 흔드는 몸짓

외줄타는 철지난 낙엽

애달파했던 허기짐에

몰래 귀동냥하는 사랑

후조의 숨바꼭질 사랑

붉게 그대의 향기가

신기루 되어 보이는

가슴차고앉은 빈자리

그림자로 따라 붙는

고운님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나는

봄비가 내리는 오후

 

 

 

봄비가 내립니다

 

- 김하인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봄비를 바라보는 여자

 

봄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비 오면 우산 펴들듯 내 키와 몸집에 맞는 사랑 펴들 수 있길 바랍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슬픔과 아픔에 마음 젖고 가슴 젖셔지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보고픔 펴들고 당신 만나러 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작은 하늘 삼아 세상 속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부디 내 그리움 나팔꽃처럼 활짝 펴들고 가는 길 끝에 당신 마중 나와주시겠지요?


봄비가 그치면 세상은 달라진다.

젖은 대지는 움트는 생명력을 내뿜을 것이다.

봄비.

가늘지만 거대한 너의 힘을 본다.

커피 향이 더욱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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